[김필남의 영화세상] 오늘이 불행한 청춘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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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장건재 감독 영화 '한국이 싫어서'
청년 계나의 '헬조선' 탈출 이야기
"무한경쟁 시대 속 청춘 위로해"

영화 '한국이 싫어서' 스틸컷. 디스테이션 제공 영화 '한국이 싫어서' 스틸컷. 디스테이션 제공

퇴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출근이야?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다. 떠지지 않는 눈을 반쯤 뜨고 어제 입었던 옷을 대충 걸쳐 입고 집을 나선다. 마을버스 열두 정거장을 지나 지하철 1호선을 탔다가 다시 2호선에 올라 강남 사무실까지 장장 2시간이 걸린 출근길이다. 출근을 했을 뿐인데 치열한 전투를 한 차례 치른 패잔병 같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피곤하다. 벌써 집에 가고 싶다.

출퇴근이 힘들어도,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해도 ‘계나’는 참는다.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나기 위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재개발 아파트에 들어갈 희망에 부푼 엄마는 계나가 모아둔 3000만 원을 빌려 달란다. 계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냥 아파트 평수를 줄여 가자며 엄마의 부탁을 흘려듣는다. 그러니까 계나는 어디서 살든 무슨 일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참을 수 없는 건 오늘 내가 먹을 점심 메뉴 하나 마음대로 고르지 못하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오늘을 희생하는 것이 견딜 수 없다.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는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풍족하진 않지만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고, 오래 사귄 애인이 원하던 직장에 취업했고, 좋아하는 일은 아니지만 꼬박꼬박 월급 나오는 회사도 다닌다. 겉보기엔 그럴듯한 삶이지만 계나는 답답하다. 행복하지 않다. 불행해서 한국을 떠나겠다고 꾸준히 말한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나는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홀로 뉴질랜드로 떠난다.

장강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한국이 싫어서’는 소설 내용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장건재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살린다.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이 계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녀를 둘러싼 주변 상황을 둘러보게끔 한다. 특히 계나의 뉴질랜드의 생활과 한국에서의 일상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장면은 단순히 두 삶을 비교하는 방식이 아니라서 좋다. 뉴질랜드에서 계나는 한국에서만큼 치열하게 산다.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부족한 영어와 인종차별까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더 많다. 그럼에도 계나는 편안해 보인다. 이 지점에서 계나가 한국에서 왜 그토록 힘들었는지 알 수 있다.

영화 제목에서만 노골적으로 ‘한국이 싫다’고 할 뿐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은유적으로 이를 알리고 있는데 계나는 자신이 맹수들에게 잡아먹히는 작고 약한 ‘톰슨가젤’ 같단다. 치열한 경쟁과 약육강식이 당연시되는 한국에서 맹수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즉 계나에게 한국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많이 일해야 하고, 누군가와의 경쟁을 통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나라다. 계나가 보기에 한국은 불확실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견뎌야 하는 ‘헬조선’이다.

한국을 떠나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던 계나는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났다. 그런데 영화에는 열심히 살다 보면 기회란 주어지는 것이니 떠나지 말라는 옛 남친, 한국을 떠나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여동생도 있다. 그들은 떠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소설 원작에는 없지만 뉴질랜드에 정착한 유학원장 가족의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타국에 안정적으로 정착한 이 가족은 행복해야 하지만 무언가 불안한 기색을 내비친다.

그들은 여기가 아니어서 떠났지만, 거기도 정답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그런 의미로 이 영화에서 여러 번 반복하는 ‘한국이 싫어서’는 진짜 한국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다. 무한 경쟁 시대를 비판하는 동시에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힌 청춘들에게 여러 선택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롭게 시작해도 괜찮다고 청춘들을 위로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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