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주막(酒幕)
문계성 수필가
집사람은 안마기에 발을 넣고 소파에서 쉬고 있었다. 항암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집사람은 마치 전장(戰場)에서 거친 전투를 치르고 빈사 상태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병사처럼 지쳐 있었다. 집사람의 코가 저렇게 길었었나 라고 생각할 만큼 코가 길어 보였으므로, 내게는 그런 집사람이 생소했다. 집사람은 광대뼈와 볼이 두툼해서 코가 작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항암 치료는 두툼하던 집사람을 마른나무 막대기처럼 만들어 놓았다. 앙상해진 어깨는 생명이 도망쳐 나간 흔적처럼 보였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는 이야기꾼의 이야기 소리처럼 조곤조곤하게 들렸다. 창밖을 내다보던 집사람이 무언가 말을 했는데, 잘 듣지 못한 나는, 집사람이 요양병원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말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의중을 확인하기 위하여 집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집사람이 응시하고 있는 것은 창밖의 비였고,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 앞에 암담히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슬픔과 언짢음, 그리고 가슴벽이 바늘로 찔린 듯한 지독한 아픔이 밀려왔다.
무슨 말을 했는지 묻고 있는 내 얼굴에, 그녀는 아주 조그맣게 말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요?” 항암 치료를 시작한 지가 2년이 넘었지만, 집사람은 단 한 번도 죽음을 입에 담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은 의외였다. 그렇지만, 그런 의외의 것이 우리에게도 다가올지 모른다.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경험해 보지 않은 것들은 알 수가 없고, 그래서 경험 이외의 것들은 믿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의문 속에서, 의문을 묻어 둔 채 그냥 살아간다. 죽음이 그런 것일 것이다. 정말 궁금하지만 경험할 수가 없으므로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며 살아간다. 어릴 때, 평상에 누워 바라보던 하늘을 떠울렸다. 수많은 별들이 빛나는 보석처럼 뿌려져 있었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 그 별들이 이 지구처럼 가없는 우주를 떠도는 또 다른 지구라는 것을 알았다.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있는 이유를 알아? 그곳은 전부 이 지구처럼, 사람의 실체(實體)인 영혼들이 저 끝없는 우주를 여행하다 쉬고 싶을 때 쉬어가는 곳이야. 사람의 영혼은 우주를 여행하는 나그네거든! 우리도 이 우주를 여행하는 나그네야. 우리는 어느 날 이 지구별을 지나다가, 마치 여행객이 쉬어갈 주막(酒幕)에 들리듯이 이 지구에서 행장을 푼 거야. 지구별에서는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하므로 우리는 각각 너와 내가 된 거야!”
“이 지구별에서 우리의 일생은 저 우주의 하룻밤과 같아. 그래서 너무 짧은 하룻밤인데, 우리는 이 짧은 밤에 긴 인생의 꿈을 꾸는 거지. 뜨거운 사랑을 하고, 미워도 하고, 배신도 해 보고, 의리 때문에 목숨을 버려보기도 하고, 가슴이 아려 녹아내리는 헤어짐의 아픔을 겪기도 하고…. 그리고 마침내 이 몸이 죽으면, 그때 우리의 실체인 영혼은 꿈을 깨는 거야! 그래서 우리 삶이 꿈일걸 알게 되지. 우리는 지금 꿈을 꾸면서도 꿈인 걸 몰라. 왜 그런지 알아? 이 인생의 꿈이 너무도 실감이 나거든!”
“우리가 지난밤 꿈을 꿀 때, 우리는 그것이 꿈인 줄 몰랐지만, 깨어보면 그것은 재미난 꿈이었지. 당신과 나는 지금까지 이 지구별에서 재미난 한편의 꿈을 꾼 거야! 이 꿈에서 깨어나면, 당신은 이번의 우리 인생에서 얻은 정서를 바탕으로, 다른 별에서, 그 주막에서 새 생활인 또 다른 꿈을 꾸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가 함께한 이 삶은 다만 작은 이야깃거리가 될 거야.” 창밖에는 슬픔처럼 지독한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