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의 곰곰 생각] '입틀막' 시대 유감
논설위원
'바이든-날리면' 보도 방송사 중징계
'김건희 특검' 언급 때 '여사' 누락 제재
대통령 명예훼손·짜깁기 영상 등 수사
소송, 제재도 남발 '자기 검열' 초래
스웨덴 연구소 "한국, 언론 자유 침해"
비판·토론·풍자 자유로워야 민주주의
최근 한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한 평론가가 ‘김건희 특검’을 언급하자 사색이 된 진행자가 황급히 ‘김건희 여사 특검’으로 정정하는 촌극이 빚어졌다. 앞서 선거방송심의위원회가 SBS 시사 프로에서 ‘여사’ 호칭이 생략됐다며 행정지도 중 권고를 의결한 뒤에 벌어진 일이다. 이후 방송사마다 ‘여사’ 누락 발언을 수정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자기 검열로 입단속에 성공한 나쁜 사례다.
2022년 윤석열 대통령 방미 중에 나온 이른바 ‘바이든-날리면’을 보도한 방송사들이 무더기 제재를 받았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는 11일 MBC에 최고 수위인 과징금을, YTN과 OBS, JTBC에는 관계자 징계, 주의를 의결했다. 이는 법정 제재에 해당하는데 방송사 재허가·재승인 때 감점 사유가 되는 중징계다. 심의에 오른 방송사 9곳 대다수가 해당 인터넷 기사를 삭제, 비공개 처리 혹은 자막 수정으로 ‘성의’를 표해 제재 수위를 낮추려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1심 판결만 갖고 방송사를 압박해 백기 투항시킨 모양새가 되어 언론 재갈 물리기라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침해 논란을 빚는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경찰 수사로 번진 ‘가상으로 꾸며 본 윤 대통령 양심 고백’ 영상 소동은 ‘웃픈’ 경우다. 대통령실이 나서 “총선을 앞두고 허위 조작 영상이 확대 재생산되지 않도록”이라고 방향을 지시하고, 방심위는 국내는 물론 틱톡과 인스타그램 등 글로벌 플랫폼에서 해당 영상이 접속 차단되는 조치를 신속하게 취했다.
이 사건 초기에는 인공지능 딥러닝 기술로 만든 딥페이크인 것처럼 알려졌다. 선거법상 딥페이크 정보 유통은 불법이다. 하지만 이 영상물은 방송을 단순 짜깁기한 것으로 딥러닝과는 무관하다. 시쳇말로 웃자고 패러디 개그를 하는데 정색하고 다큐로 받은 꼴이 됐다. 소셜 플랫폼에 떠도는 수많은 동영상 ‘밈’까지 처벌할 건가? 가상을 전제하고 만든 풍자를 강제 수사한다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위헌적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이를 계기로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tvN 예능 프로에 나와 “정치 풍자는 권리”라던 호언이 소환되면서 대통령을 풍자한 개그까지 등장했다.
권력과 비판적 언론 사이에 긴장감은 어느 시대나 있다. 한데, 요즘은 경계가 무너진 느낌이다. 윤 대통령의 경우는 대선 후보 때 검증 보도를 놓고 아직도 강제 수사가 진행 중이다. 명예훼손 사건이 촉발돼 지난해 9월 검찰에 ‘대선 개입 여론조작 사건’ 특별수사팀까지 구성됐다. 관련된 언론사와 기자에 대해 전방위적인 압수수색이 벌어졌고 기자들에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유력 대선 후보를 검증하는 보도에 대대적인 강제 수사가 벌어진 건 유례가 없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2021년 한 기자가 소셜 플랫폼에 ‘해운대 엘시티 수사를 왜 그 모양으로 했대?’라고 쓴 글에 대해 1억 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가 최근 2심에서 패소했다. 권력과 언론의 건강한 긴장 관계에 대한 해답이 판결에 있다. ‘언론으로서는… 주요 수사 기관 고위공직자에게 충분히 의혹 제기를 할 수 있다.… 공직자인 한 위원장은 비판에 대해 해명과 재반박을 통해 극복해야 하며, 손해배상 소송을 통해 언론 감시와 비판을 제한하려고 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가 7일 공개한 ‘민주주의 보고서 2024’를 읽다가 한국 대목에서 같은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언론 자유와 독립성을 위축시키려는 정부의 시도는 언론인 괴롭히기(harassment of journalists)와 맞물리고… 그리스와 한국은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침해가 가혹한 독재 국가만의 일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이 연구소는 언론 자유 등을 조사해 1점 만점의 자유민주지수(LDI)를 산출하는데, 한국은 2021년 0.79(17위)에서 2023년 0.60(47위)으로 급락했다. 부연 설명은 낯뜨겁다. ‘(윤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 이전 수준으로 LDI를 되돌려 놓았다.… 이미 권력 남용(abuse of power)을 보여 주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지금 ‘입틀막(입 틀어 막기)’은 대통령 ‘심기’ 경호에만 한정되지 않고 전방위적이다. 강제 수사나, 소송, 제재 등은 자기 검열, 나아가 침묵을 강요하는 ‘입틀막’이다. ‘민주주의 보고서 2024’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수단은 언론의 자기 검열 수준을 높이는 것’이라 우려한 것도 같은 말이다. 물리적 ‘입틀막’이 임계치를 넘으면 ‘스스로 입틀막’이 일상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비판하고, 토론하고, 풍자하고, 웃고 살자. 알아서 입을 닫는 사회를 바라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