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MoCA, 오늘 만나는 미술] '풀숲에 지는 달'을 감상하는 초현실적 관점
■김춘자 '풀숲에 지는 달'
반쯤 내려오는 달빛도 졸고 있는 밤 한가운데에 어디서 이슬이 날아와 풀잎에 슬며시 앉는다. 작은 이슬은 세상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싹을 품은 풀씨와 알들 속으로 스며든다. 이름이 아직 없는 원시 생명들은 적당한 달빛과 이슬로 또 다른 세상을 준비한다. 온통 초록인 세상 여기는 꿈틀거리는 여린 생명에게 일터이고 놀이터이며 우주이다. 슬그머니 침입한 이방인의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알 수 없는 미래 이야기를 자기들끼리 작게 속삭인다. 아주 작게.
갑자기 눈이 밝다. 달빛은 사라지고 강한 햇살이 눈에 들어온다. 아~ 꿈이었다. 어젯밤 나는 현미경보다 작은 풀잎 속 세상을 헤매고 다녔구나. 본 것 같지만, 있었던 것 같지만, 자신 없어 고개를 숙이고 달빛 흐르는 밤만 있는 미지의 세상을 이리저리 돌아다녔구나. 꿈에서.
김춘자의 ‘풀숲에 지는 달’은 꿈속에서 일어난 풍경을 옮긴 그림일지도 모르겠다. 김춘자는 8~90년대 부산에서 ‘형상미술’을 형성했던 작가라고 평가받고 있다. 현재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자신이 창조한 형상을 여전히 캔버스에 옮기면서 말이다.
‘풀숲에 지는 달’(1990년 제작)은 작가가 삼십 대, 좌절도 꿈도 많던 시절에 화면 어디라도 소홀함 없이 정성 들여 그린 그림이다. 현실에서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동물의 생명이 잉태하고 자라는 과정과 그것을 지켜보는 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여러 식물을 조합한 유화 작품이다. 캔버스 크기로 따지면 150호나 되는 대형작품으로 두 쪽으로 나누어 제작되었다.
캔버스 화면은 대략 세 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아래층은 밝고 붉은 황토색으로 구분되어 있다. 여기에는 식물의 뿌리인 듯 혹은 꼬리와 머리에 꽃이 달린 공작식물(?)인 듯한 형태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바로 위층에는 더 옅고 얇은 황토색 띠로 구분되어 있다. 여기는 중간층으로 맨 위층과 경계에 작은 흰 꽃이 무더기로 모은 머리를 가진 무언가 있다. 무언가는 팔짱을 끼고 한 눈으로 화면 중앙에 있는 알에서 막 깨어나 날개를 펼치는 혹은 알을 지키는 나비를 관찰하고 있다.
가장 위층 왼쪽에는 반쯤만 빛나는 달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나누고 보니 캔버스 가운데 유독 푸른색으로 두드러지는 심장 모양을 한 공간 속에 알과 애벌레 같은 형상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앉은 나비는 눈을 치켜뜨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전체 분위기는 은밀하고 느리게 움직이며 주변을 경계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긴장감이 있지는 않다. 다만 초록색이 깔린 화면은 차분하고 조용히 응시해야 할 것 같은 공간이다. 김경진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