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디지털 세대가 보내는 위기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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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희 전 (사)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지하철을 타고 오가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나와 비슷한 각도로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 안의 작은 기기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상당수가 시청하고 있는 것은 숏폼 형태의 짧은 영상이다. 15초 이내 영상들이 휙휙 지나가며 우리 시선을 끝없이 붙잡는다. 테크 기업들이 천문학적 비용을 투자해 자신들의 소셜미디어로 시선을 고정하도록 만든 마법의 알고리즘 덕분이다. 나부터가 훌륭한 실험 대상이었는데, 한동안 퇴근하고 집에 가면 부동자세로 침대에 누워 두세 시간씩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 일쑤였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친근하게까지 여겨지는 디지털 시대 일상의 풍경이 최근 읽은 책 때문인지 하나의 낯선 위기 신호로 다가온다. 몇 달 전 출간된 조너선 하이트의 〈불안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환경에 노출된 첫 세대인 이른바 Z세대의 정신적 위기를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드러낸다. 담배와 술 중독성 못지않게 스마트폰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장시간에 걸친 스마트폰, SNS, 인터넷 사용이 아동과 청소년의 뇌와 정신 건강에 끼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미국에서 우울증을 겪은 십대 비율이 2010년도 이후 남자아이는 161%가 증가했고, 우울증이 남자아이보다 3배 이상 높았던 여자아이의 경우 145%가 증가하여 수치가 더 큰 폭으로 상승했다. 응급실 방문 자해 환자도 2010년도 이후 여자아이는 188% 증가했고, 남자아이의 경우에도 48%가 증가했다. 저자는 디지털 세계로의 진입은 아직 신체 발달과 뇌 발달이 다 이루어지지 않은 십대 청소년들을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화성에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경고한다.

저자는 이 모든 현상이 현실 세계의 과잉보호와 가상 세계의 과소보호가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현실 세계를 안전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아이들을 과잉보호하면서 자율적 활동과 성장의 기회를 제약한다. 그러나 가상 세계에서는 아이들을 거의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테크 기업들은 아동과 청소년에게 심리적 트릭을 사용해 클릭을 계속하게 함으로써 자사의 제품에 열중하게 만든다. 이 시기에 뇌가 자극에 반응하면서 빠른 회로 변경이 일어나는데 아동·청소년들이 손쉽게 접하는 매체에는 소셜미디어, 비디오게임, 포르노 사이트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포르노랜드〉의 저자 게일 다인스 역시 오늘날 포르노를 처음 접하는 평균 연령은 고작 11세라고 전한 바 있다. 그는 아이들의 성적, 정서적, 인지적, 관계적 발달에 미칠 해로운 영향을 고려할 때 너무나 손쉽게 접하게 되는 하드코어 포르노는 디지털 시대의 공공보건 위기라고 정의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디지털 시대의 공공보건 위기의 결과를 이미 여러 차례 마주하였다. N번방 사건이 대표적이다. 가해자 중 10대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최근 딥페이크 성범죄에서 그 비중은 더욱 커졌다. 생성형 AI 기술을 이용한 성 착취물이 제작되고 SNS 플랫폼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확산한 범죄에 전국의 초·중·고등학교는 속수무책이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1~10월 검거된 딥페이크 성범죄 피의자 474명 중 10대 피의자가 381명으로 80%를 넘게 차지했다. 이 중 14.9%는 촉법소년이다. 피해자의 규모나 연령대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법 적용조차 어려운 어린 소년들이 범죄 가담자가 되어 가고 있는 현실의 심각성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까.

최근 국회에서 딥페이크 성범죄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입법 성과가 있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딥페이크’ 등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해 경찰의 위장 수사를 허용하는 성폭력 처벌법 개정안이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된 것이다. 이로써 수사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경찰의 초동 대응으로 가해자를 신속하게 검거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처럼 범죄 해결을 위한 입법적 보완 못지않게 근본적인 해결책들을 제도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

자동차는 너무나 편리한 도구이고 우리의 세상을 뒤바꿔 놓았지만,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성인이 되어 그 위험성을 충분히 숙지한 후 일정 시간의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하여 면허를 획득해야만 한다. 내 손안의 디지털 세상도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왔지만, 그 위험성 또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디지털 노마드’ 세대는 현실의 과잉보호와 온라인 공간의 과소보호 사이에서 그 위험을 무방비 상태로 고스란히 마주하고 있는 중이다. 사태를 깨달은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사회에서도 강력한 조치 도입을 검토하거나 추진 중이다. 우리 역시 이미 ‘소 잃은 외양간’인 딥페이크 성범죄의 뼈아픈 교훈을 아이들을 위한 근본적 대책으로 바꿔 나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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