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거장, 서상환 신작을 만나다
미광화랑서 27일까지 개인전
폐암 투병 중에도 신작 선보여
한국적인 성상화 개척한 ‘대가’
1940년생으로 80대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거장의 붓놀림은 여전히 거침없었다. 몇 년째 폐암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전시장의 반 이상을 올해 그린 신작들로 채웠다. 현장을 찾은 이들은 또 한 번 감탄하며, 이 전시가 제발 거장의 마지막 개인전이 되지 않기를 한목소리로 기도한다. 전시 첫날과 마지막 날을 제외하곤 젊은 작가들조차 전시장을 지키지 않고, 갤러리 대표와 큐레이터에게 전시를 맡기지만 80대 거장은 늘 그렇듯 이번에도 매일 전시장으로 출근하고 있다. 천재로 불리는 부산 작가, 서상환 화백이 그 주인공이다.
부산 수영구 미광화랑에서 27일까지 열리는 서상환 ‘신의 가면’전은 서 화백이 오랜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서 화백은 평생 기독교와 한국적인 느낌이 혼재하는 성상화(聖象畵, ICON)를 독창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서 화백을 두고, 모 평론가는 “철학, 종료, 예술을 하나의 텍스트로 녹여내는 연금술적 정신과 역량을 지닌 미술가”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연금술은 대립하는 이중적인 것을 혼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뜻으로 쓰였다.
서 화백은 종교적 정신에 바탕을 두고 인간에 대한 구원 의식을 그린다. 기도하는 손, 인간, 촛불, 십자가, 눈동자, 나무 등 성상과 관련한 기호와 도상을 결합해 오늘날의 민중과 소외당하는 인간 군상에 대한 구원 의식이 캔버스에 담긴다. 그래서 서 화백의 그림은 상징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지만, 서 화백의 주요 그림 시리즈에 만다라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색적이다. 만다라는 일반적으로 불교의 승려들이 명상 수행의 일환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만다라의 본질은 중심과 질서에 의한 평온과 깨달음이고 성상화처럼 만다라에는 불교적 성상을 그린다. 서 화백에게 기독교 성상화이든 불교 만다라든 평온과 깨달음, 인간에 대한 구원은 하나로 통하는 듯하다.
분명한 형태를 알 수 없는 비구상적 작품은 어렵다는 인식이 있지만, 서 화백 그림의 경우 메시지나 형태가 명료하고 단순하다. 철학적, 종교적 세계관이 모두 들어있지만,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이란다. 그림 형태 또한 천진난만한 아이들 그림으로 보이기도 하고, 강렬한 디자인 작품 같기도 해, 보는 재미도 있다. 1970년대부터 줄곧 이어지는 서 화백의 성상화는 정작 2024년 트렌디한 젊은 작가들의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만의 독창적인 실험성은 몇십 년의 세월을 앞섰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이번 전시에선 화백의 대표 매체인 대형 판화를 비롯해 드로잉, 채색화, 판각화를 모두 만날 수 있다. 2024년 신작은 대부분 아크릴과 수채 물감을 사용한 채색화들이다. 병마로 쇠약해져 더 이상 작가의 대형 판화 작업이 힘들다는 건 안타깝다.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여전히 수십 점의 신작 채색화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귀한 전시이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