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재파의 생각+] ‘서울 중심적 흑백요리사’
동아대 기초교양대학 교수·공모 칼럼니스트
지난달 넷플릭스의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 종영했다. 쇼는 끝났지만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요리사와 심사위원의 어록은 밈(meme)이 되어 유행처럼 퍼지고 있으며 프로그램에 참여한 요리사들이 있는 식당은 예약 플랫폼에서 몇 초 만에 예약이 마감된다고 한다. 또 요리사들이 프로그램에서 조리했던 음식들은 상품화되어 편의점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이쯤 되면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은 흑백요리사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는가.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하여 만든 거대한 스케일의 무대, 독특한 캐릭터와 스토리를 지닌 출연진, 치열한 과정 끝에 조리된 예술 작품 같은 요리, 전문성과 인지도를 갖춘 심사위원의 평가 등 많은 요소가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무엇보다 ‘백수저와 흑수저’라는 계급을 설정하고 계급 간 대결을 펼치는 프로그램 형식이 한국 사회의 공정성에 대한 생각거리를 던져 줬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국 사회의 곳곳에는 불공정이 만연하다. 올해만 하더라도 음대 입시 비리, 선관위 채용 세습 논란 등 불공정 관련 뉴스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회적 배경이나 지위, 즉 계급장 떼고 오직 ‘맛’이라는 실력 하나만으로 승부를 가리겠다는 선언은 공정한 사회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프로그램 초반 일대일 미션에서 심사위원의 눈을 가리고 진행한 블라인드 테스트는 프로그램의 백미로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프로그램 후반으로 갈수록 애초 지향했던 공정이 점차 우리 사회의 현실과 같이 불공정으로 흐르면서 시청자들의 공분을 샀다. 먼저 요리사들이 팀을 이루어 레스토랑 미션을 진행하였는데, 팀 간 대결이라는 조건 때문에 요리사 개개인이 제대로 된 요리 하나 만들지 못한 채 팀의 승패에 따라 탈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이 과연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부여한 것인지 논란이 일었다.
이뿐만 아니라 레스토랑 미션을 진행하는 도중 예고 없이 팀별로 한 명의 요리사를 방출하게 하고 방출된 요리사끼리 팀을 만들어 레스토랑 미션을 진행하게 하였다. 문제는 방출된 팀의 경우 다른 팀보다 인원이 적고 경연 준비 시간도 부족했다는 점이다.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대결은 진행되었고 예상대로 방출팀은 패배하여 모두 탈락했다.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절차적 공정성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 분노하였다.
여기까지는 프로그램이 방영될 당시부터 많은 사람에게 비판받은 내용이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이 미션에는 더 큰 불공정이 도사리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서울에서 촬영되었다. 따라서 서울에 거주하는 요리사들은 전화 몇 통으로 자신들의 거래처를 통해 싸고 품질 좋은 재료를 구할 수가 있었던 반면 해외나 지방에서 참가한 요리사들은 근처 마트에서 재료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느 요리사의 말대로 ‘요리사보다 높은 것이 재료’인데 서울에 살고 안 살고의 여부가 승패를 좌우할 만큼 큰 차이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이 불공정하다는 점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즉 ‘서울 중심적’ 사고와 규칙이 사회에 고착화돼, 그것이 불공정한 것인지도 모르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상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더 큰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무의식 속에 당연한 듯이 자리 잡은 서울 중심적 사고와 규칙은 불공정을 인식조차 못 하게 하여 더 큰 불공정과 불행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에 좋은 인프라가 들어서는 일은 당연한 반면 지방에 인프라가 구축되는 일은 예산 낭비라고 보는 인식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서울 중심적 사고는 수도권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황폐화와 소멸을 초래하고 부추기는 끔찍한 결과를 만들었다.
다시 흑백요리사로 돌아가 어떻게 하면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보자. 첫 번째 방법은 요리 프로그램 경연을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진행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참가자 모두에게 동일한 재료를 일괄 제공하는 것이다. 동일한 맥락으로 우리 사회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첫째는 서울 중심적 정책을 지방 중심적 정책으로 바꾸는 일이고, 다음은 서울에 투입되는 재원만큼 각 지방에도 똑같이 재원을 분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정성만을 내세운 방법은 경제성과 같은 다른 가치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통하여 구성원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공정성의 실현 방법을 찾는 일이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