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나무위키 규제에 반대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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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공모 칼럼니스트

불특정 다수 참여 오픈 소스 백과사전
지식 나눔의 기쁨 인간 본성의 결과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 기록
막말 의혹 등 고스란히 정치인들 불편
정치권 개인정보 침해 핑계 규제 시도
접속 차단해도 다른 나무위키 생길 것

전자사전은 학창 시절 인기 아이템 중 하나였다. 스마트폰은 개념조차 없던 시절, 형편이 괜찮은 친구들은 전자사전과 인터넷 강의를 넣은 PMP를 들고 다니며 공부에 참고했고 나머지 친구들도 종종 그것들을 빌려 쓰곤 했다. 전자사전엔 으레 메모장 기능이 탑재돼 있었다. 그런데 사실 남의 전자사전에 메모를 남긴다는 것은 마치 도서관 책에 밑줄을 긋는 것과 같아서 누구도 그 기능을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기계든 사람이든 버그(오류)는 생기게 마련. 누군가가 한 친구를 놀린다고 메모장에 그의 별명과 유래를 적어놓은 것이다. 유행의 시작을 알리는 한 줄이었다. 수능 공부로 지쳤던 우리는 수업 때마다 전자사전을 만지며 킥킥댔다. 메모장에는 선생님과 학생들의 별명, 유행어, 심지어 체육대회 결과까지 온갖 내용들이 담겼다.


어느덧 그 전자사전은 3학년 4반의 역사와 밈을 담은 하나의 백과사전이 되었다. A4 용지로 몇 페이지를 넘어설 만큼 방대한 분량이었다. 고3 시절 참여형 백과사전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면 지금쯤 엄청난 부자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위키피디아 창립자 지미 웨일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제작과 편집이 불특정 다수에게 개방되는 오픈 소스 백과사전이 가능하다고 보고 2001년 위키피디아를 만들었다. 내용상의 오류는 집단지성에 의해 바로잡힐 거라 믿었다. 사전 내용 채운다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이용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지미 웨일스는 지식을 나눔으로써 재미와 보람을 느끼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 위키피디아가 있다면 우리나라엔 나무위키가 있다. 세계적으론 위키피디아가 대세일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선 나무위키 접속량이 7배는 더 많다. 웹사이트 접속자 순위도 지난달 1일 기준 5위를 기록했다(시밀러웹). 구글·유튜브·네이버 같은 포털사이트를 제외하면 사실상 가장 많은 접속자를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최대 참여형 온라인 백과사전인 나무위키의 기원은 특이하게도 일본 애니메이션 ‘건담’이다. 2007년 한 건담 팬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위키피디아를 본뜬 백과사전을 운영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이들은 애니메이션 정보나 인터넷 가십 등을 사전에 담았는데, 기존 백과사전은 외면하는 정보를 취급한다는 점에서 젊은 층으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사전은 이후 정치·경제·역사 등 기존 백과사전이 다루는 영역까지 확장했다. 그게 오늘날의 나무위키가 됐다.

나무위키의 최대 장점은 일상성이다. 나무위키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등재된다. 넷플릭스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의 등장인물과 그들로부터 파생된 각종 유행어는 물론, 부산불꽃축제 감상 가능 지역 리스트까지 온갖 정보를 망라한다. 제22대 총선을 다루더라도 선거의 개요나 결과만 취급하는 게 아니라 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에피소드나 논란의 전개 과정 등을 상세히 설명한다. 별도의 사실 확인이 필요하긴 하지만 흐름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신변잡기적인 정보까지 모두 기록되는 나무위키는 정치인들에게 불편한 존재다. 자신들의 과거 막말과 의혹 등이 고스란히 ‘박제’되는 이유에서다. 언론 보도는 금세 흘러가지만 나무위키에 등재된 정보는 두고두고 남는다. 허위 사실이 아니라면 지우기도 쉽지 않다. 정부 여당이 나무위키 규제를 추진하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김장겸 국민의힘 의원은 최근 “나무위키가 파라과이에 소재를 두고 있어 국내법을 무시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개인정보 침해, 허위 사실 유포 등이 바로잡히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역시 “경고 이후에도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전체 차단도 고려할 수 있다”고 화답했다.

표면적으론 법적 문제 때문인 듯하나 실상은 정치적 이유가 크다. 나무위키는 구조적으로 보수 정당에 불리하다. 이용자 대부분이 젊은 층이라서다. 나무위키는 논쟁적인 팩트(fact)에 관해선 이용자들의 토론을 거쳐 합의된 내용을 등재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고지전’이라고 부른다. 청년층 지지가 낮은 국민의힘 입장에선 이 토론에서 이겨 지식의 깃발을 꽂는 게 상대적으로 불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다고 어떤 사이트를 차단하는 건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격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기 이전에 개인이 남기고 싶은 지식을 기록하는 메모와 일기의 총합이다. 어떠한 권위도 부여된 적 없지만 많은 사람이 쓰면서 절로 권위가 실렸다. 나무위키 접속을 차단해도 자신이 가진 지식을 기록하고, 알리고 싶은 개인의 욕구마저 막을 순 없다. 그 거대한 욕구 자체를 통제하는 게 아니라면, 나무위키 접속을 차단해도 새로운 나무위키들은 다시 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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