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처음부터 끝까지
김남석 문화평론가
노벨상 수상 열기가 독서 열풍으로 이어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반가우면서도 우려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기억으로는 아마도 맨부커상(Booker Prize) 때도 비슷한 소식이 들렸는데 다시 같은 소식이 들리는 것을 보니, 한강의 책을 읽다 만 것인지 아니면 다시 사서 읽기로 한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런 식의 독서 열풍은 우려스럽다. 젊은 세대에게는 더욱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10년 전만 해도 어떠한 계기든 어떠한 책이든, 읽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책을 잘 읽지 않는 한국인의 특성상, 그 책이 무엇이든 읽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어떻게 읽느냐도 중요하지만, 왜 읽느냐도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가끔 묻는다. 왜, 책을 읽느냐고? 아니 물을 때는 거꾸로 물어야 했다. 왜 책을 읽지 않느냐고? 수업 교재조차 읽지 않으려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이 의문은 필연적이다. 대부분은 우물쭈물 넘어가려고만 한다. 책을 읽지 않는 이유를 자신들도 정확하게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노벨상 수상 열기로 독서 인기
과거와 현재 독서방식 달라져
"책을 왜 읽는지 생각해야"
이미지와 영상의 세례를 받고 태어난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컴퓨터가 이미 존재했었다. 한 사회학자는 유년 시절이 지난 이후 컴퓨터가 상용화된 세대와 애초부터 컴퓨터가 있었던 세대는 사고방식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사실로 판단된다. 독서와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그 덕분에 글을 읽고 문자 체계를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글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순차적으로 읽고 또 쓰기 위하여 노력했다. 원고지에 쓸 때는 상당한 파지를 각오해야 했는데, 그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사고로 쓰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자연스럽게도 이렇게 쓰인 글을 읽을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글쓴이의 사고와 생각의 흐름을 존중하려 애썼다. 시작부터 일정한 전제가 깔리고 접근 방식이 설명되어야 했고, 문장을 통해 차례로 생각의 터널이 뚫리면서, 끝에서는 글과 책이라는 전체 사유가 이해와 기억의 영역 속으로 들어와야 했다.
모니터와 컴퓨터는 독서 습관을 바꾸었다. 필요한 부분만 바로 찾아볼 수 있었고, 전체를 건너뛰고 부분만 읽을 수도 있었다. 글 쓰는 습관도 바뀌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책을 쓰는 것이 아니고, 부분부분 써서 조합하기도 했고, 일부만 써서 확대하기도 했다. 독서의 측면에서 보면, 일관된 흐름이나 전체적 조감보다는 필요한 대목을 찾고 필요한 방식으로 요약하면 그만인 읽기가 상용화되었다.
대학 강의 수강 시에도, 학생들은 개조식 노트 필기나 PPT를 더 강하게 원한다. 빨리 읽을 수 있고, 간단하게 외울 수 있고, 그래서 쓰고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과목을 공부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풍조도 은근히 만연한 상태이다. 한강의 소설도 어쩌면 그러한 운명에 빠져들 수 있다. 한강의 소설을 통해 소설과 문학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의도는 희미하고, 유명하고 유행하는 정보를 재빨리 얻으려는 시도가 반짝이고 있다.
이러한 독서 방식은 곧 사그라질 것이다. 요점만 얻고자 하고 그것도 빨리 얻고자 하고 유행하는 무언가를 다시 쫓고자 하는 의도라면, 천천히 흐르는 서사의 줄기나 유장하게 지나는 시간의 사유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성의 있는 독자가 많이 탄생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생각이 틀렸기를 바란다. 하지만 만일 이 우려가 틀리지 않는다면, 노벨문학상 수상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수도 있다. 다른 수상자가 탄생할 때까지, 한국 문학을 향한 열기는 다시 바닥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