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작가와 독자 사이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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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노벨상·일본어판 ‘토지’ 완역
K문학 해외 진출 번역의 힘 되새겨
빈약한 도서·출판 정책 개선 필요
독서로 응원하는 한국 문학의 내일

일본 쿠온 출판사의 토지 완역 프로젝트팀이 독자들과 함께 지난 19일 경남 통영 산양읍 박경리 선생 묘소를 찾아 총 20권의 일본어판 소설 <토지> 헌정식을 가졌다. 오금아 기자 일본 쿠온 출판사의 토지 완역 프로젝트팀이 독자들과 함께 지난 19일 경남 통영 산양읍 박경리 선생 묘소를 찾아 총 20권의 일본어판 소설 <토지> 헌정식을 가졌다. 오금아 기자

“번역은 최고의 독서 길잡이입니다.”

무대 위 일본인 번역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객석의 한국 소설가는 공감을 표했다. 번역가는 이어서 번역이 아니라면, 한국 최고 걸작이라 불리는 대하소설을 이렇게 깊이 읽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번역한 작품을 쓴 저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 인사를 받은 저자는 고 박경리 선생이다.

지난 토요일 통영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일본의 한국 관련 서적 전문 출판사 쿠온이 소설 〈토지〉 전 20권 일본어 완역을 박경리 선생 묘소 앞에서 기쁜 마음으로 보고했다. 쿠온의 토지 완역 프로젝트는 총 10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원작 소설 완간 30주년이 되는 올해 ‘일본어판 토지 완역’이라는 새 기록이 추가됐다. 장소를 옮겨 진행된 기념식에서는 프로젝트와 관련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프로젝트가 시작된 2014년. 한국 문학 작품은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 출판계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작은 출판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말리는 사람이 더 많았지만, 쿠온 김승복 대표는 열정으로 프로젝트를 밀고 나갔다. 박경리 선생과 작품을 알리는 작업에 대한 책임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한 번역가와 편집자, 교정자, 감수자. 현장에서는 토지 완역 프로젝트팀을 ‘드림팀’이라고 불렀다.

기념식 축사에서 한 소설가는 작가 줌파 라히리가 남긴 “나는 번역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소개했다. 영어와 벵골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환경에서 자란 라히리는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에서 이탈리아 소설 〈끈〉에 압도돼 그 책을 번역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고 밝혔다. 번역은 ‘장기이식이나 심장판막 수술만큼 위험하고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일’이지만 내가 매료된 작품을 다른 언어권의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한강 작가의 대표작 〈채식주의자〉를 세계에 알린 영국인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도 마찬가지였다.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운 스미스는 한강 소설의 매력에 빠져 번역, 출판사 섭외, 홍보까지 앞장섰다. 작가와 좋은 번역가의 만남이 한국 첫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대단한 성과를 끌어냈다.

번역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최근 열린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한강 같은 작가’를 찾는 문의가 이어지는 등 한국 문학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좋은 번역으로 한국 문학의 매력을 널리 알리면, 해외 독자와 번역가가 같이 늘어난다. 번역가가 늘면 다양한 작품이 현지에 소개되고 한국 문학의 영향력도 더 커질 수 있다. 우수한 번역가 양성과 지원은 한국 문학의 해외 진출에 필수적이다. 2016년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국제부문 수상 이후 한국 문학의 국제문학상 수상은 31건이지만, 한국문학변역원의 번역출판지원사업 예산은 지난 5년간 18여억, 올해 20억으로 제자리걸음 중이다.

번역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유통망에서 소외된 작은 서점, 지자체에 떠넘겨진 독서 문화 증진 사업, 관련 예산 삭감 등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쏟아지는 뉴스에서 우리의 빈약한 현실에 대한 지적이 넘친다. K문학의 시대는 그냥 열리는 것이 아니다. 노벨문학상 특수에 편승한 깜짝 이벤트나 생색내기 지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 문학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지속성·체계성·다양성을 갖춘 정책 마련과 예산 집행이 필요하다. 한국 문학의 새로운 미래를 마주한 가을. 한국 문학의 저변 확대가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형태로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쓰는 작가와 읽는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통영 행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토지 완역 프로젝트를 향한 독자들의 응원이었다. 쿠온이 도쿄 진보초에서 운영 중인 책거리 서점 단골이라는 한 독자는 〈토지〉 각 권의 발행주기까지 꿰고 있을 정도였다. 통영에 오기 전 〈토지〉 20권을 모두 읽었다는 그는 일본 독자들이 책을 같이 읽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독서회나 연구 모임을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렇게 든든한 독자 우군이 있어 작은 출판사의 무모한 도전이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역에서 맹렬히 활동 중인 한국 출판사 대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저는 쓰는 사람이기 전에 읽는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고단한 날에도 한 문단이라도 읽고 잠들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한강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작가, 번역가, 편집자, 교정자, 출판과 서점 관계자… 수많은 손길을 거쳐 한 권의 책이 온다. 누구든 그 책의 독자가 될 수 있다.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한국 문학의 발전과 함께할 우리의 독서를 응원한다.

오금아 콘텐츠관리팀 선임기자 chris@busan.com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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