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객지(客地)에서의 장례
문계성 수필가
가슴 아픈 정이 없다면
삶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것을
그 아픈 정 때문에
모순에 가득 찬 세상을 견딘다는 것을
이 무의미한 삶이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어느 해 늦가을, 나는 낯설기 짝이 없는 산과 들로 둘러싸인, 서울에서도 한참이나 북쪽에 있는, 마른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어느 산 아래 서 있었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거세게 불어오는지, 늙은 버드나무가 바짝 마른 나뭇잎을 바람에 날리며 부러질 듯이 휘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산과 들 뿐만 아니라, 바람조차 낯선 곳이었습니다.
그 이틀 전, 형님으로부터 “고모가 돌아가셨다!”라는 간단한 부고를 접했을 때, 나는 고모님이 당연히 고향에 매장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서울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고종형님은, 장지가 포천 어느 교회 묘지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엄마는 고향에서 묻히고 싶다며, 외가집 밭에 묻어 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자주 찾아보기 위해 서울에서 가까운 교회 묘지에 모시기로 했다. 엄마 말을 어기는 마지막 불효를 하기로 했다.”
순간 나는 가슴이 먹먹해 왔습니다. 고모님은 친정과 친정 조카들을 좋아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고모님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으므로, 고모님을 가족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모님을 낯선 먼 객지에 매장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낯선 객지에서 잠들어야 하는 고모님의 마지막 길이 서글프기까지 했습니다.
고향 집에서의 어느 여름이 생각났습니다. 그 보름 동안, 우리 집 대청에는 늙은 두 여인, 어머니와 고모님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사는 분이라, 틈만 나면 관세음보살과 나무아미타불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그러나 고모님은 오랫동안 기독 신앙에 젖어 사신 분이라 매일 아침 혼자서도 예배를 보는 분이었습니다.
고모님은 육십이 넘도록 고향에서 사시다가, 늘그막에 아들이 서울로 삶터를 옮기는 바람에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고모님 댁이 우리 집과 바로 이웃이라, 날만 새면 보던 어머니와 고모는 서로 그리워했고, 그래서 어느 해 여름 고모님은 우리 집에 머물며 회포를 풀게 되었습니다. 고모님은 ‘물도 씻어 먹는다’고 소문이 날 만큼 깔끔한 분이었고, 어머니는 너무 깔끔 떨면 복 나간다며 대강대강 살림하였으므로, 서로가 대조적이었습니다.
고모님은 매일 아침 머리를 빗질하고 옷을 가지런히 한 다음, 우리 집 대청에 앉아 혼자 예배를 보았는데,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는 절차가 교회에서 하는 예배 절차와 똑같았습니다. 고모님이 예배를 진행하는 동안, 어머니는 방에서 열심히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을 염송했으므로, 그 보름 동안 우리 집 아침은 찬송가와 염불로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보름이, 어머니와 고모님이 이승에서 함께한 마지막 날들이었습니다.
고모님을 그 마른 바람이 휘몰아치듯 불어오는 낯선 객지에 묻고 돌아오면서, 나는 손수건이 젖도록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토록 고향과 친정을 좋아했던 고모님을, 그 거친 바람이 불어오는 낯선 땅에 버렸다는 생각과, 그 낯선 땅에 홀로 남겨져 쓸쓸해하시는 고모님의 모습이 자꾸 눈에 어른거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모님보다 더 오래 사셨던 어머니는 햇살이 눌러앉는 대청에 앉으면 고모님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 간 곳이 어디길래 한 번 가면 다시 못 올까? 무덤이라도 그 객지에 쓰지 말고 여기에 쓰지, 이리 보고 싶은데….”
젊은 시절, 유독 탈속한 삶을 동경했던 나는, 정은 과거에 얽매인 기억으로,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슴 아픈 정이 없다면 삶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것을, 그 아픈 정 때문에 이 모순에 가득 찬 세상을 견딘다는 것을, 그 정 때문에 이 무의미한 삶이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나이가 많아진 이즈음에야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