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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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1955~ )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난다.

알고 보면 향기는 풀의 상처다.

베이는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비명 대신 풀들은 향기를 지른다.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

상처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나는

아픈 것도 잊는다.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시집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2015) 중에서

참으로 놀라운 시다.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나’는 현상을 통해서 ‘향기는 풀의 상처다’란 명제를 유추해 내는 것은 보통의 통찰력이 아니다. 그 말은 상처가 곧 향기일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험 속에서 상처는 고통, 악취, 죽음 등의 부정적 의미를 띤다. 그런데 상처가 향기가 된다는 발언은 상식을 넘어선다. 여기서 우리는 풀은 상처를 향기로 승화시키고, 상처는 향기가 될 수도 있다는 두 가지 역설적 진실에 눈뜨게 된다.

그로 인해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말하는 마음의 경지에 대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상처를 두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상처가 가진 영향 때문일 것이다. 실제 상처는 흉터를 남긴다. 생각해 보면 흉터야말로 삶의 아픔과 고난을 이기고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무늬 아닐까? 상처의 흉터로 존재의 의미를 생생하게 자각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없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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