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추억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조병화(1921~2003)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1949) 중에서

그리움은

잊어버리자고

애쓸수록 더 잊혀지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리움에 사무친다는 말이 그런 경우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바다 기슭’은 구원의 장소다. ‘바다 기슭을 걸어보는’ 것으로 마음은 정화된다. 해소되지 않는 ‘추억’의 갈증은 사무치는 그리움의 부작용이다. 그래서 ‘하루

이틀

사흘’ 하염없이 바다 기슭을 걷는 사람은 구원과 형벌을 다 받고 있다. 그에게 그리움은 전혀 퇴색하지 않는 얼굴로 ‘여름 가고 가을 가’는 시간의 물결 속에서 어룽댄다.

그리움은 물러섬이 없다. 사람을 불러내 끝없이 헤매게 만든다. 젊은 날 박상규의 ‘하루

이틀

사흘’을 부르며 이송도, 해운대, 광안리 바다 기슭을 쏘다니던 것도 그리움의 성분 탓 아니었을까? 그리움은 독과 같아서 한 번 몸 안에 들어오면 광기에 휩싸여 천지를 떠돌 수밖에 없다. 참으로 기이하고 기구한 속성이다. 김경복 평론가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