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미술관과 아파트, 이기대 동상이몽
김영한 사회부장
부산이 지켜온 해안 비경 명소
거대한 ‘숲 미술관’ 탈바꿈 예고
첫걸음 퐁피두 분원 유치 가시화
성공하면 박형준 시장에겐 업적
이기대 입구엔 아파트 개발 시도
부산 남구청 막기는커녕 돕고 나서
달맞이언덕과 함께 부산의 해안 비경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명소, 이기대에 일대 변화가 예고됐다. 무려 8000만 년 동안 생명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조용히 모습을 바꿔 온 역사를 꺼내지 않더라도 해안 탐방로를 한 번이라도 걸어본 사람이라면 왜 부산이 이기대를 사랑하는지, 또 지켜왔는지 저절로 느끼게 된다. 그 이기대가 크게 바뀔 모양이다.
이기대는 수년 내에 ‘숲 미술관’으로 재탄생될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굳이 이기대를 바꾸려 든다면 유일한 방법은 예술이어야 한다는 데에 적극 동의한다. 부산시는 이기대를 어떤 예술공간으로 만들지 용역을 진행하고 있고, 연내에 구체적인 밑그림을 시민들에게 내놓기로 했다.
이기대 숲 미술관을 이룰 시설도 하나둘 공개되고 있다. 변화의 첫걸음이 프랑스의 세계적 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 분원으로 향하고 있는 사실은 다행스럽다. 일도 꽤 진척된 듯하다. 며칠 전 부산시가 언론사 문화부 기자들 대상으로 연 간담회에서는 박형준 시장이 직접 나서서 퐁피두 분원 유치 현황을 설명했다고 한다. 퐁피두 분원 유치에 성공한다면 그 위치로 이기대 중간인 어울마당을 점찍었다고도 했다.
이기대와 퐁피두. 아직은 이질적으로도 느껴지지만 부산시는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다. 부산시가 설명하는 퐁피두 분원 규모도 상당하다. 퐁피두 측에 3만㎡ 부지를 내줘 연면적 1만5000㎡ 건물을 짓는다는 게 부산시 설명이다. 내·외부에는 전시실, 창작공간, 수장고, 커뮤니티홀, 교육실, 야외공원도 갖춘다.
퐁피두 분원은 최종 결실을 맺는다면 박 시장의 주요 업적이 될 것으로 보인다. 퐁피두 분원은 부산 전체로 보면 북항에 들어설 오페라하우스, 최근 준공한 부산콘서트홀, 부산 기장군에 문을 연 영화촬영소와 묶여 새로운 부산 예술문화 벨트가 꿰어질 핵심 고리이기도 하다.
이기대는 박 시장에게도 중요한 장소가 됐다. 그가 이기대를 활용하는 첫 정치인이 됐다는 의미다. 실제 박 시장은 지난해 10월 20일 연 기자회견에서 “해양문화도시로 만들기 위해 이기대를 활용하기로 했다”면서 “이날부터 이기대예술공원 기본계획 용역에 들어가 2024년 말까지 마무리 짓겠다”고 공언했다.
‘정치인 박형준’이 내세운 ‘이기대 활용법’은 그 자체로 ‘정치적 카드’가 됐다. 1997년 군사보호구역에서 해제된 이후에도 이기대는 전체적인 경관을 잘 유지했다. 오륙도 앞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일 정도가 아쉬운 변화였다. 이기대에 눈독을 들인 여러 건설업체가 개발 시도에 나서기도 했지만 부산시와 관할 지자체는 시민과 함께 해안산책로를 조성하고 국가지질공원 지정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이기대를 지켜왔다. 그 연장선에서 박 시장은 생태와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이기대를 바꾸겠다는 아이디어를 고안했고, 첫 행보로 퐁피두 분원 유치에 공을 들여왔다. 이기대 활용법 성공 여부에 따라 그의 정치적 발걸음도 바뀔 수 있다.
관건은 이기대의 본원적 가치를 지켜 활용하는 데 성공하느냐다. 이기대에 채울 시설을 유치하는 일 역시 간단치 않지만 이기대를 잃어버리지 않을 방법은 언제까지고 고민해야 할 숙제다. 퐁피두 분원이 들어와 긍정적 결과를 낳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부산 시민이 비행기가 아닌 버스를 타고 가 세계적 미술품을 향유할 기회를 얻는 일은 사실 큰 변화다. 지역 미술계에도 새로운 기회다. 아시아권을 비롯한 국내외 관광객이 퐁피두 작품을 보러 부산으로 몰려온다면 금상첨화다. 부산시는 이기대가 일본의 나오시마, 덴마크 루이지애나현대미술관, 독일 인젤홈브로이미술관처럼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비슷한 때, 이기대 가치를 무너뜨리려는 탐욕도 불거졌다. 사실 이기대는 개발업자들이 항상 군침을 흘리는 표적이었다. 고향 부산을 떠나 2008년부터 ‘서울 건설사’가 된 아이에스동서(주)가 이기대 길목에 아파트를 짓는 사업 인허가 절차를 밟고 있다. 건설사 계획대로 31층, 29층, 28층 등 3개 동 짜리 아파트가 들어서면 시민들은 이기대를 한눈에 볼 권리를 박탈당한다. 이기대 아파트가 부산에서 진행하는 마지막 사업이라는 게 아이에스동서 측 관계자의 해명이었는데, 부산에서 여러 차례 아파트 사업으로 재미를 본 건설사가 마지막으로 이기대를 망치고 떠나겠다는 꼴이다. 이런 시도는 아이에스동서 하나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앞장서서 이기대를 지켜야 할 행정기관이 오히려 건설사를 돕고 나서는 상황은 답답하기만 하다. 부산 남구청은 당초 용적률 200%까지만 허용된 해당 아파트 사업 부지에 대해 250%까지 올려 지을 수 있도록 제한을 풀어버렸다. 전문가들도 “세계적 미술관은 미술관과 주변부 조화가 너무도 중요한데 미술관 가는 길을 아파트가 막아서면 기능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이기대 숲 미술관이 아파트 입주민 미술관이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김영한 기자 kim0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