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곪을 대로 곪은 채용 비리, 선거 공정성에도 타격
‘복마전 선거관리위원회’ 어쩌다 이 지경까지
“감사원 생활 24년 만에 이런 조직은 처음 본다.” 대체 어떤 조직이길래 대한민국의 모든 행정기관과 공무원 직무를 감찰하는 감사원의 고위 간부가 이런 말까지 했을까. 감사원 고위 간부까지 혀를 끌끌 차게 한 문제의 기관은 바로 선거관리위원회. 헌법 제114조에 그 역할과 조직 구성이 명시돼 있을 만큼 선거관리 전문 기관으로서 헌법적인 지위를 보장받고 있는 곳이다.
그런 선관위가 최근 직원 채용 등 내부 비리가 감사원 감사를 통해 알려지면서 한순간에 국민적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선거관리가 전문인 선관위는 국민들에게 ‘공정과 상식’의 대명사로 통하는 헌법기관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은 그동안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 선거 등을 총괄한 선관위의 공정성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선거관리는 물론 내부 행정에서도 같은 수준의 공정성 기준이 지켜지고 있으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사원의 감사 결과는 국민들의 이런 생각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그동안 직원 채용 등에서 상식 이하의 온갖 탈·불법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접한 국민들의 충격은 컸다.
■10년간 매년 상식 이하 특혜 채용
감사원이 이번에 실시한 ‘선관위 채용 등 인력관리 실태’ 감사는 그 대상이 2013년 이후 10년간이다. 그 이전에도 직원 특혜 채용 의혹이 제기됐으나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감사를 받아본 적이 없는 데다 감사 범위를 넓힐 경우 얼마나 많은 채용 비리가 쏟아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최근 10년간으로 기간을 한정했다고 한다.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우선 인력 채용 과정에서 일어난 규정 위반만 무려 1200여 건으로 밝혀졌다. 10년간 중앙선관위에서 124차례, 지방선관위에서 167차례 진행된 경력 채용 중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비리나 규정 위반이 있었다. 3000명에 달하는 전체 선관위 직원 중 10%에 달하는 직원이 채용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감사원이 검찰에 수사 의뢰 등으로 넘긴 선관위 전·현 직원만 무려 49명에 달한다니 그동안 선관위의 내부 규율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알 만하다.
채용 비리를 구체적으로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특히 감사원 최고위직의 ‘아빠 찬스’를 통한 공직 사유화가 심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김세환 전 사무총장 아들 A 씨는 인천 강화군청에서 근무하다 2020년 1월 인천시선관위로 이직했다. 당시 인천시선관위는 정원 초과 상태였는데도 중앙선관위는 A 씨가 지원한 이후 경력 채용 인원을 추가 배정했다. 면접 위원 3명은 모두 사무총장과 친분 있는 내부 직원이었고 그중 2명이 A 씨에 만점을 줬다. 김 전 총장의 후임이었던 박찬진 전 사무총장의 딸 B 씨도 광주 남구청에 근무하다 2022년 3월 전남선관위에 경력 채용됐다. 이 과정에서 전남선관위는 외부 면접위원에게 점수 없이 서명만 기재한 평정표를 요구했고 선관위 인사담당자가 사후 면접 점수를 조작해 B 씨를 합격시켰다. 송봉섭 전 사무차장의 딸 C 씨도 충남 보령시청에 근무하다 2018년 1월 충북선관위로 이직했는데, 이 과정에서 인사 청탁이 있었다. 일주일 뒤 C 씨만 대상인 비공개 채용이 진행됐고 C 씨는 만점으로 역시 합격했다.
이외에 지방선관위 상임위원과 국·과장의 자녀 등 부당 채용 사례는 허다했고 무단결근 등 인력 관리도 엉망이었다. 시선관위의 한 사무국장은 8년간 무려 170일을 무단결근하면서 해외여행만 70차례 다녀왔다는 내용도 있다. 선관위의 도덕불감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조직적인 감사 방해 행위도
내부 도덕불감증이 도를 넘어선 선관위는 감사원의 감사 진행 도중에도 국가기관으로선 해서는 안 될 감사 방해 행위까지 조직적으로 벌였다. 감사 시작 전 전직 사무총장 등 고위 간부의 자녀 채용과 관련된 내용을 삭제하는 것은 물론 부하 직원 간 관련 메신저 내용까지 없애도록 했다. 자료 요구에 시간을 질질 끌거나 관련 서류를 고의로 훼손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선관위의 이런 고압적인 행위는 이전부터 있었다. 감사원과 선관위 간 ‘직무 감찰’을 둘러싼 공방이 30년 동안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계속된 탓이 크다. 1994년 감사원법 개정 당시 국회에서 직무 감찰 대상에 선관위 포함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었고 2011년 18대 국회에선 선관위를 제외하는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감사원과 선관위의 논쟁은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했다.
감사원은 감사원법 제24조에 직무 감찰 대상 제외 기관으로 국회, 법원, 헌법재판소 소속 공무원만 명시하고 있어 선관위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면 선관위는 헌법에 명시된 독립기관인 만큼 감사 대상이 아니라고 버텨왔다. 결국 선관위는 계속 직무 감찰 자체를 거부해 왔고 그러는 사이 선관위의 내부 비리는 곪을 대로 곪아갔다.
■“선관위 해체 수준 개혁” 규탄 봇물
국가 기관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선관위의 행태가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분노를 넘어 허탈한 심정을 토로한다. 이렇게 부패하고 낯 두꺼운 기관이 최고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선거관리 업무라고 제대로 했겠느냐는 의심과 탄식도 나온다. 2022년 대선 때 코로나 확진·격리 유권자들이 기표한 투표용지를 소쿠리, 라면상자, 비닐쇼핑백에 담아 옮겨 놓은 일명 ‘소쿠리 투표’ 사태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총선 등 사전선거 부정 의혹도 따지고 보면 선관위 불찰로 인해 불거진 측면이 적지 않다.
이처럼 유례없는 내부 비리로 선거 업무의 공정성까지 의심받는 상황에서 선관위는 이제 안팎의 쏟아지는 개혁 요구를 뿌리치기 힘들게 됐다. 이미 전국 6000여 명의 대학 교수들이 참여하는 교수 모임, 정경희 국민의힘 의원, 자유변호사협회 등은 해체적 수준의 선관위 개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국민들도 이번에는 선관위가 강력한 쇄신과 개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여긴다. 국민에게 신뢰와 권위를 잃은 선관위가 과연 공정한 선거관리를 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안팎의 들끓는 여론을 고려할 때 선관위 개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일이 됐다. 당장은 대법관을 비롯해 법관이 각급 선관위원장을 맡는 관행부터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또 선관위가 행정기관인 이상 정기적인 감사를 통해 외부의 견제를 받아야 한다는 국민도 많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결과가 지금의 참담한 선관위 추락이다.
현재 선관위는 감사원의 직무 감찰 권한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해 놓은 상태다. 감사원의 감사 범위가 명확히 어떻게 되는지 헌재의 판단을 받아보자는 것이다. 이르면 올해 안에 결론이 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 여론은 선관위에 부정적이다.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지금 선관위는 해체 수준의 개혁을 하지 않는 이상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다.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선관위의 존재는 국민은 물론 우리나라에도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