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의 지금 여기] 행복한 대통령의 길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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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尹 행보 상징하는 두 키워드
‘법률안 거부권’과 ‘선심성 정책’
헌법적 정당성 없는 거부권 남용
다른 목소리 경청 않으려는 ‘독단’
이를 상쇄하려고 설익은 정책 봇물
총선 겨냥한 ‘포퓰리즘’ 아닌지

2020년 출간된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은 우리나라에서 박수받고 퇴임하는 대통령이 드문 이유를 살핀 책이다. 역대 대통령들을 국내 정책·외교·언론·리더십 같은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한 결과가 그 근거다. ‘대권’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한국의 대통령제는 ‘제왕적’인데, 최고 통치권자가 무소불위의 힘으로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행태야말로 불행의 주된 원인이라는 게 책의 요지다.

이 책의 화두가 지금 눈길을 끄는 이유는 22대 총선이 불과 두 달 반 앞으로 바싹 다가와서다. 한국의 정치 구조상 대통령과 총선의 역학관계는 정권의 명운을 좌우하는 중대 요소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현재 대통령실과 정부·여당의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한 것도 그런 이유다.


이즈음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는 두 개의 키워드로 요약된다. ‘법률안 거부권’과 ‘선심성 정책’이 그것이다. 그런데 거부권은 정치 공세에 대한 정당한 행사로 인식되고, 선심성 정책은 ‘민생’을 위한 것으로 포장된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지금까지 여덟 차례를 기록 중이다. 양곡법, 간호법, 노란봉투법, 방송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과 이른바 ‘쌍특검법’(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 특검법·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이 그 목록이다. 현재 고심 중인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한 거부까지 더해지면 9회가 된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역대 대통령(이승만 43회, 박정희 7회, 노태우 7회, 노무현 6회, 이명박·박근혜 각 1회)의 사례와 비교해도 한참 과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단연 최다다. 아직 대통령 임기가 절반 이상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거부권은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 고유 권한이지만 위헌 혹은 국익 침해 등 헌법적으로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거부권이 ‘전가의 보도’가 된 이 상황이 과연 정상적인지 의문이다.

특히 ‘김건희 특검법’ 반대는 거부권 논란의 핵심을 이룬다. 모든 의혹을 털어낼 기회를 대통령 스스로 저버렸다는 점에서 그렇다. 무엇보다 국민 70% 이상이 이 법안을 찬성하고 65% 이상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반대한다. ‘김건희 리스크’는 최근 명품 가방 수수 의혹까지 겹쳐 윤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정면충돌로 번진 상황이다.

결국 거부권 남용은 자신과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독단’의 의미로 읽힐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국민 여론이나 민심의 자장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는 의미다.

거부권 행사의 반대쪽에 ‘선심성 정책’이 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보인다. 지난 한 달여 사이 쏟아진 감세·현금성 지원 관련 정책이 20여 건에 이른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증권거래세 인하,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 비과세 한도 대폭 상향, 상장기업의 기업 승계를 돕는 상속세 완화 시사 등등. 이전에 수시로 발표한 세금·전기요금·은행 이자 인하 등 대책까지 합치면 단순 나열하기에도 숨이 벅차다.

문제는 ‘민생 안정’이라는 당위만 있지 치밀한 준비 끝에 나온 정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체계적이고 일관된 정책 결정 과정보다는 일시적 성격의 행사에서 즉흥적으로 발표되는 일이 잦다. 대통령실에서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총리를 비롯한 각 부처 장관은 하달된 정책의 집행 기구에 불과하다는 의혹이 여기서 나온다. 그렇지 않다면 주무 부처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정책 혹은 갑자기 기조가 바뀌는 정책이 나오는 이유를 설명할 길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선심성 정책 안에 아무런 재원 대책이 없다는 데 있다. 세수 규모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대목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이 없다. 대부분 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라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결국 총선을 앞둔 ‘포퓰리즘’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책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규정된 임기 안에서 한시적 권한을 위임받은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과거의 업적을 이어받아 좋은 점은 더욱 발전시키고, 다른 한편 잘못된 점은 시정하는 것이 원칙이어야 한다.’ 그동안 한국 대통령의 말로가 불행했던 건 저 원칙을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대개 자기편 잘못은 감싸고 상대편은 악(惡)으로 여겨 타격했다. 그 틈새로 측근들의 호가호위, 계파 정치, 연고·학벌주의가 판을 쳤다. 윤 대통령과 현 정부의 잦은 거부권 행사와 설익은 선심성 정책이 이런 폐해를 가리기 위한 방편이 아니길 바란다. 대통령의 불행은 나라와 국민의 불행이다. 불행은 겪을 만큼 겪었다. 민심과 국정을 외면한 채 불행의 길로 들어서는 대통령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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