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가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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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홍범도 역사적 정체성 논란
철 지난 이념 논쟁에 온 나라 ‘홍역’
“일부 정부 인사 극우 시각” 우려도
분단 이후 체제 경쟁은 남한의 완승
편향된 주의·주장에 흔들리지 않아
다양성 포용하는 강자 면모 보여야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무부장 김규식, 재무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 사법부장 김병로, 체신부장 신익희…. 1945년 9월 8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면면이다. 조선인민공화국은 해방 직후 자생적인 건국 운동이던 건국준비위원회를 확대·개편해 조직됐다. 이를 주도한 주체는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그런데 그 인적 구성이 의아하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만식, 김병로 등 주요 부처 수장 상당수가 우익 인사다. 더구나 박헌영은 내각에서 뺐다.

미군 진주가 임박한 상황에서 조선공산당은 다급했다. 좌익 인사만으로 정부를 구성할 경우 무엇보다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우익 인사를 전면에 내세우고 조선공산당은 배후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을 조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전형적인 통일전선전술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 여하튼 조선공산당의 시도는 실패했다. 미군의 영향도 있었고 우익 인사들의 반발도 컸지만, 무엇보다 당시 민중의 정서가 조선공산당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78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가 이념 논쟁으로 시끄럽다. 광주광역시가 열려는 정율성 음악제를 두고 정부·여당이 비난을 쏟아붓더니, 곧이어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흉상 철거(또는 이전) 여부를 놓고 온 나라가 홍역을 앓고 있다. 정율성도 홍범도도 항일투쟁의 공로는 기림을 받기에 충분하지만, 각각 ‘중공’과 ‘소련’에 연관된 이력 때문에 찬반 논란의 소용돌이에 말려 들었다. 이들을 비난하는 측은 ‘국가에 해를 끼친 인물’로 낙인찍은 채 전문 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해석에는 눈과 귀를 닫는다.

작금의 이런 이념 논쟁이 전혀 뜬금없는 건 아니다. 윤석열 정부가 시작되면서 주요 직책에 임명된 인사들의 면면에서 이미 충분히 짐작됐다. 특히 국가 안보를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실과 내각 책임자들 중 상당수가 자유와 반공을 유달리 강조해 왔다. 이들 중 몇몇 인사들에 대해 일각에선 극우 또는 뉴라이트라는 타이틀을 붙여 비난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런 형편이니 윤석열 대통령이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는 반국가세력” 운운하며 이념 논쟁의 선두에 나서는 모습은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자유와 반공을 외치는 심리의 근저에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보다 직접적으로는 북한에 대한 불안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이는 한국전쟁이라는 참상을 겪은 이후 어쩔 수 없이 배태된 우리 국민의 본능적 감정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7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체제 경쟁의 승패는 확연히 드러났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나 국제적 위상 등 모든 면에서 지금 남한은 북한에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다. 우려하던 군사력에서도 남한의 우위가 확인된다. 비정부기구인 ‘글로벌 파이어 파워’(GFP)가 올해 6월 발표한 ‘2023년 세계 군사력 지수’를 보면 남한은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 영국에 이어 세계 6위다. 북한은 겨우 34위다.

이쯤이면 남한과 북한의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난 게임이다. 정율성이나 홍범도 같은 인물들을 남한 사회가 수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체제 경쟁에서 완승했다는 그런 자신감이 배경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이제는 달라졌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윤 대통령도 지난달 15일 광복절 축사에서 반국가세력을 언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한민국과 북한의 극명한 차이가 여실히 드러났다”고 강조하지 않았나.

이미 끝난 게임에 호들갑은 공연한 낭비일 뿐이다. 반국가세력? 혹시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 봐야 한 줌도 안 되는 그들의 주장과 행태 따위에 흔들릴 만치 우리 사회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정율성이든 홍범도든 그들의 행적을 애써 숨겨 가며 미화할 필요도 없고 막연한 의심과 두려움에 내칠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다 밝혀 두면 된다. 그게 강자의 면모다. 78년 전 조선인민공화국을 거부했던 민중인데, 체제 경쟁에서 완승한 지금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압도적인 힘에 의한 평화”라고 하는데, 이미 남한의 국력은 북한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핵 도발? 원래 약한 이들이 공갈하는 법이다. 국제 사회에 “나 좀 봐 달라”며 부리는 북한의 투정일 따름이다. 실질적인 위협이 된다고? 걱정 마시라. 우리에겐 ‘굳건한’ 한미 동맹이 있다. 올해 4월엔 윤 대통령의 방미로 미국의 핵우산을 구체화한 ‘한미 핵협의그룹(NCG)’까지 만들어졌다. 여차하면 하늘에선 미국 전략폭격기가, 바다에선 미국 핵 항모가 전개될 것이다. 거기다 지난달 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로 3국간 안보협력체가 공고화하면서 북핵 대응력은 한층 높아졌다. 도대체 두려울 게 무엇인가.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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