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타페 사고 유가족 “제조물책임법 바꿔야” [이슈 라운지]

손희문 기자 moonsl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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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타페 급발진 의심 사망 사고’
긴 다툼 끝에 16일 최종 판결
법원, 급발진 입증 증거 부족
‘제조사 배상 책임 없다’ 판단
“소비자 직접 결함 입증 불가능”
유족 상처·의문 여전히 진행형

2016년 8월 부산 남구 감만동에서 발생한 급발진 의심 싼타페 사고 차량. 당시 싼타페가 트레일러에 들이받으면서 운전자를 제외한 일가족 4명이 숨졌다. 부산일보DB 2016년 8월 부산 남구 감만동에서 발생한 급발진 의심 싼타페 사고 차량. 당시 싼타페가 트레일러에 들이받으면서 운전자를 제외한 일가족 4명이 숨졌다. 부산일보DB

“차가 왜 이래! 브레이크 안 들어! 잠깐만… 안 돼!”

온 가족이 여름 물놀이를 가던 길이었다. 차량이 갑자기 질주를 시작했고, 이내 차 안은 비명으로 가득 찼다.

2016년 8월 2일, 부산 남구 감만동에서 출발한 싼타페 차량은 물놀이를 떠나던 최성민 씨의 가족을 태우고 있었다. 차량에는 최 씨의 장인과 장모, 아내, 그리고 두 아이 등 총 5명이 타고 있었고, 운전자인 장인 한무상 씨를 제외한 4명은 모두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급격히 속도가 붙은 차량은 14초 간 아찔하게 도로를 질주했고, 순식간에 갓길에 주차된 트레일러의 후미를 들이받고서야 멈췄다. 사고로 차를 몰았던 장인은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뒷좌석에 타고 있던 장모와 아내, 두 자녀는 모두 숨졌다. 둘째 손주가 태어난 지 갓 100일을 넘긴 첫 소풍날, 가족은 그렇게 돌아오지 못했다.

■법원 판단은 “제조사 책임 없다”

사고 이후 운전자의 사위인 최성민 씨는 차량 제조사인 현대차와 부품 제조사인 로버트보쉬코리아를 상대로 100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운전자였던 장인이 택시 운전사로 일한 경험이 있고 차량의 결함이 당시 블랙박스 영상으로 확인되는 만큼 ‘운전 미숙’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사고 발생 9년 만인 지난 16일, 법원은 싼타페 차량 제조사인 현대자동차에 배상 책임이 없다는 최종 판단을 내렸다.

2022년 1월 열린 1심에서 부산지법은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고, 10억 원으로 청구액을 줄여 진행한 항소도 2023년 5월 부산고법에서 기각됐다.

최 씨 측은 싼타페와 동일한 엔진을 사용하는 제조사 일부 차량에서 ‘고압 연료 플렌지 볼트 풀림 현상’으로 경유 누유가 발생하고, 이 경유가 엔진오일과 섞여 재연소되면서 ‘오버런’(엔진이 정상 회전수를 초과해 과도하게 회전하는 현상)에 따른 급발진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급발진을 입증할 객관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등을 토대로 사고 차량 엔진과 고압 연료펌프 주변에서 연료나 기름 누출, 작동 이상을 의심할 만한 특이점이 없었다고 판단했다.

유족 측이 자동차 전문가들에게 의뢰한 감정 결과도 역시 공신력이 부족한 ‘사적 감정’ 결과에 불과하다며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블랙박스 영상 등을 토대로 운전자인 한 씨가 페달을 오조작해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을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최 씨는 지난 17일 〈부산일보〉 취재진과의 통화에서 “수천 개 부품과 전자 제어 장치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고도의 기술 집약체인 자동차의 결함을 소비자가 직접 입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피해자는 결국 밝히지 못했다

‘싼타페 급발진 사망 사건’은 가장 상징적인 ‘급발진 의심 사고’로 꼽히지만, 8년간의 소송 끝에 제조사 배상 책임은 끝내 인정되지 않았다.

국내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급발진 의심 사고로는 △2016년 부산 싼타페 사고(일가족 4명 사망) △2019년 경기 양주 그랜저 사고(세차장에서 돌진 후 역주행해 사망 1명·부상 2명) △2021년 인천 강화 티볼리 사고(저수지로 돌진해 1명 사망) 등이 있다. 차량 결함 가능성이 제기됐던 이들 사고는 법원에서 제조사 책임이 모두 인정되지 않았다.

가장 최근 사례로는 2023년 12월 서울시청 인근에서 발생한 택시 돌진 사고가 있다. 당시 택시가 인도를 넘어 보행자를 치는 사고로 이어졌지만, 경찰 조사 결과 운전자가 브레이크 대신 가속페달을 밟은 사실이 확인돼 급발진보다는 운전자 과실에 무게가 실렸다.

전문가들은 현행 제조물책임법이 소비자 입증 책임을 지우는 구조 자체는 현실적으로 바뀌기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단서 조항 등을 통해 법제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대림대 자동차학과 김필수 교수는 “수많은 부품이 결합된 차량의 구조상 사고 원인을 단순히 ‘결함’ ‘급발진’으로 단정 짓기는 매우 어렵다”며 “기술적·법적 허들이 높아 급발진을 입증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고 말했다. 이어 “다만 제조물책임법에 단서 조항이라도 소비자 중심으로 한두 건씩 여지를 두면, 현재 제조사에 유리하게 기울어진 구조를 일부 바로잡을 수 있다”며 “특히 싼타페 사고처럼 블랙박스 영상과 사고기록장치(EDR) 간 정보가 엇갈리는 경우, ‘제조사도 사고 원인 규명에 보다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내용이 핵심적으로 담겨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가족에게 남은 상처와 의문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긴 재판을 마친 최 씨는 “10년에 가까운 재판 과정이 허탈하고 참담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하다”며 “제조사도 운전자도 명확한 원인을 입증하지 못한 상황에서 유족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건 너무 억울하다. 재판의 성패를 떠나 싼타페 사건이 제조물책임법을 의미 있게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손희문 기자 moonsl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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