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희망 없는 시대, 행복을 꿈꾸다
영화평론가
추창민 감독 영화 '행복의 나라'
10·26 사태에 상상력 가미해
고 이선균의 묵직한 연기 담겨
‘행복의 나라’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영화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관통한다는 점에서 ‘서울의 봄’과 닮아있지만, 사건의 최전선에서 물리적 충돌과 시시각각 변하는 정세를 긴박하게 좇는 ‘서울의 봄’과는 달리 일종의 후방-법정에서 일어난 ‘쪽지재판’을 사건화한다는 점에서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영화는 10·26 대통령 암살 사건 발생 이후 수사, 기소, 심리, 사형 구형까지 단 54일이 걸린 재판 과정을 그린다.
이때 추창민 감독은 54일 동안의 재판 과정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비극적 시대 속 개인을 포착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로 인해 영화는 사건이 중심이 되기보다는 인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주목하면서 사건 자체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허구적 인물을 동원한다. 그러고 보면 감독은 역사 속 작은 틈새를 찾아 그 자리에 상상력으로 채우는데 일가견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광해군의 15일간의 행적이 빠져 있는 것에 착안해 만든 ‘광해, 왕이 된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번 영화도 실제 있었던 정치 재판을 주 내용으로 삼으며 역사와 허구 그 사이를 교묘히 오간다.
영화 오프닝은 궁정동 대통령 안전 가옥에서 시작한다. 이때 카메라는 암살당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총알을 장전하는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태주’(이선균)의 모습을 포커싱한다. “오늘 해치운다”는 명령을 전해 받은 비서관들은 초조해 보인다. 바로 이날 대통령 암살 사건이 일어나고 곧이어 사건에 연루된 이들이 검거되며 재판에 넘겨진다. 이때 유일한 군인 신분으로 단심제가 적용된 박태주의 변호를 맡는 인물이 ‘정인후’(조정석)다.
영화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던 군인 박태주, 사형선고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인후, 권력을 장악한 합수단장 ‘전상두’(유재명), 이 세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영화 속 대부분은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허구적 인물인 정인후의 경우 가장 극적으로 변화하는 인물이다. 정인후가 박태주의 변호인이 된 것은 정의나 신념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 재판은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게 아니라, 이기고 지느냐의 싸움”일 뿐이었다. 그런 정인후가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박태주와 전상두를 만나면서 변화하고 성장한다.
그런데 정인후의 성장은 꼭 긍정적이지만 않아 보인다. 정인후는 박태주의 사형선고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권력의 중심인 ‘전상두’ 앞에서 매번 좌절감을 맛보기 때문이다. 정인후와 군 검찰단 검사는 박태주의 행동을 두고 ‘내란의 사전 공모인지, 위압에 의한 명령 복종인지’를 두고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인다. 박태주에게 유리한 증인을 세우고, 자료를 찾아내지만 전상두는 ‘쪽지’ 하나로 모든 것을 무화시킨다. 재판을 감청하고, 재판부를 좌지우지하며, 일이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폭력으로 해결하는 모습에서 정인후는 분노를 버리고 타협을 배우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소위 말하는 좋은 변호사로 성장하지만, 희망 없는 시대에 ‘좋은’ 변호사는 무력하다.
‘행복의 나라’는 단순히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흘러가는 영화가 아니다. 엄혹했던 시대임에도 선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알려주려 애쓴다. 물론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신파적인 장면들을 배치하거나, 정인후의 극적인 감정 변화가 영화에 몰입하는 방해 요소로 작동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군인 박태주를 연기한 고 이선균의 처연하고도 묵직한 연기와 그의 작은 미소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의 나라’는 충분히 의미 있는 영화이다.